의무 교육과 민주주의





민주주의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교육이란 어떤 의미와 기능을 갖고 있는가?
교육 기회의 확대와 민주주의의 실현은 어떻게 이뤄 지는가?

이 글은 이 두 가지 문제 의식에서 한국 교육을 분석한 글이다.



의무 교육의 형성 과정




John Dewey는 1916년에 그의 저서인 <Democracy and Education, Chapter Seven : The Democratic Conception in Education>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Since education is a social process, and there are many kinds of societies, a criterion for educational criticism and construction implies a particular social ideal. The two points selected by which to measure the worth of a form of social life are the extent in which the interests of a group are shared by all its members, and the fullness and freedom with which it interacts with other groups. An undesirable society, in other words, is one which internally and externally sets up barriers to free intercourse and communication of experience.

다양한 사회가 존재하고 있고, 교육이라는 것은 결국 사회적인 과정의 하나이기 마련이므로 교육적인 비판이나 해석의 기준에는 어떤 특정한 사회적 이상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란 1. 한 집단의 흥미가 구성원들 모두에게 공유된다는 것과 2. 자유롭게 다른 집단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비민주적인 사회(undesirable society)라는 것은 그 사회의 내외적으로 자유로운 교유와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차단되어 있는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듀이의 주장을 토대로 민주주의적인 교육(democratic education)에 대해 정의내리자면, 비민주적인 사회에서 민주적 사회로 넘어갈 수 있는 소양을 함양시키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의 민주주의적 역할은, 물론 민주화 세대의 두드러진 노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의무교육의 증가에 따라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의무교육의 시행과 그 내실화는 한국 사회의 문맹률을 효과적으로 감소시켰으며 이는 국민들의 기초적 지적 능력을 향상시켜 사회적인 공론을 형성할 수 있는 장을 열었다.



기초적인 교육이 국가에 의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무 교육의 개념은 독일의 루터(Luther,M.)에 의해 16세기에 처음으로 제기되었고, 아시아에서는 1885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한국인들의 자녀교육의 열기는 사논공상의 신분적 체제를 강조했던 조선의 어느 시대를 살펴봐도 찾을 수 있지만 본격적인 보통 교육에 대한 개념은 1894년에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실시되었다. 갑오개혁을 통해 문교행정을 맡아 보던 예조(禮曹)가 폐지되면서 신설된 학무아문은 1894년 7월 고시한 공고에서 "위로는 공경대부의 아들로부터 아래로 범민의 준재까지"라고 언급함으로써 신분의 차별이 없는 보통 교육에 대한 생각이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이후 1895년 2월에 고종이 교육 입국 조서(敎育立國詔書)를 발표함으로써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보다 공식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교육입국조서란 교육을 통해 나라를 세우기 위한 글이라는 의미로 조서의 원문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너희 신민의 선조는 곧 우리 조종이 보육한 어진 신민이다. 나와 너희들 신민이 조종의 큰 터를 지켜 억만년 아름다운 대업을 맞아 이어야 할 것이다. 내가 가르치지 아니하면 국가는 강성하기가 심히 어렵다우내(宇內)의 형세를 보건데 부강하며 독립하여 웅시(雄視)하는 모든 나라는 다 국민의 지식이 개명하였다. 지식의 개명을 교육의 바름을 전제로 되었으니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존하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짐은 군사(君師)의 자리에서 교육의 책임을 스스로 지노라. 교육은 또 그 길이 있는 것이니 헛 이름과 실용을 먼저 분별하여야 할 것이다. ...(중략)... 짐은 정부에 명하여 널리 학교를 베풀고 인재를 양성하여 너희들 신민의 학식으로써 국가 중흥의 대공을 이루려 하노니 너희들 신민은 충군하고 위국하는 마음으로 네 덕과 네 몸과 네 지를 길러라. 왕실의 안전이 너희들 신민의 교육에 있고 국가의 부강이 너희들 신민의 교육에 있다. 국가의 분한(憤恨)에 대적할 이가 오직 너희들 신민이요, 국가의 모욕을 막을 이가 오직 너희들 신민이요, 국가의 정치와 제도를 닦고 지을 이가 또한 오직 너희들 신민이니 이것이 다 너희들 신민의 당연한 직분이다. 학식에 따라 성과의 높고 낮음을 아뢰어라.


그러나 군주제국가로서의 조선에서 일어난 보통 교육은, 비록 소학교를 건립하고 신분의 차별이 없는 교육적 기회의 확대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 신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층에게까지 그 기회를 보장해주지는 못했으며, 그 교육의 목표도 개인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국가에 예속된 소유물로서의 신민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보다 한층 진보된 보통 교육에 대한 관점은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나타나게 된다.



1911년에 조선총독부에서 발표한 제 1차 조선교육령(第一次朝鮮敎育令, 1911 ~ 1922)의 보통 교육에 관련된 중요 부분만을 보면 



  • 2조 교육은 교육에 관한 칙어(勅語)의 취지에 터하여 충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한다.
  • 3조 교육은 시세와 민도에 적합하게 함을 기한다.
  • 4조 교육은 보통교육ㆍ실업교육 및 전문교육으로 대별한다.




조선 총독부에서 발표한 제 1차 조선교육령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보통교육의 확대를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1911년 7월 1일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선 교육이 오로지 유용한 지식과 온건한 덕조를 양성하여 제국신민다운 자질 품성을 구비하게 하는 것을 주지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먼저 보통교육의 완비를 기하고 실용교육에 중점을 둔다"라고 지방장관회의에서 주장하면서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의 보통교육 제도 완비 특히 그 중점을 두었다.


이에 따라 1918년 3면 1학교제가 실시되어 1922년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1885년 일본은 이미 의무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1909년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게까지 이미 이 기회가 확대되었고, 1910년의 한일 병합조약 체결 당시 일본인들은 소학교(오늘날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6년간의 학제를 일본 제국으로부터 무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11년 조선교육령의 선포 이후에 일본인들과 다르게 조선인들은 의무교육의 대상으로 여기진 않았고, 단지 4년 학제의 보통 교육을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조선인들의 보통 교육은 의무 교육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비의 상당 부분을 조선인 학부모가 납부해야 했다.

昭和六年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31, 조선총독부



보통학교 수와 학령인구가 증가하긴 헀지만 1911-1920년도의 수요를 충족시키기는 매우 어려운 편이었으며 이 시기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낮은 취학률은 일제가 조선인들의 교육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조선인 취학률] / 1911, 1919, 1929, 1937년, 이만규 <조선교육사> 하, 을유문화사, 1947-49, 188-189쪽 / 1912, 1915년, 昭和六年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31, 조선총독부 / 1920, 1922, 1924, 1926, 1928, 1930, 1932, 1934, 1936, 1938, 1940, 1942년, 朝鮮總督府統計年報 / 1944년, 1945년 해방과 대한민국의 경제발전_허수열 / 1945, 1948년, 문교부,「문교월보」, 특집(제41호), 1958. 9, p.57; 김종철(1989), 한국교육정책연구, p.108.
[일본인 취학률] 1915년, 이만규, 『조선교육사(하)』, 188~189쪽. 1920년 당시 조선 내 일본인은 35만 명으로 조선 인구의 2%정도였음.
[대만인 취학률] 1926, 1936(실제로는 1935년), 1940년, 서중석·정재철,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133쪽 / 1944년, 이토 키요시의 <대만>


1922년 2월에는 3.1운동의 영향으로 조선 총독부에 새로운 총리로 사이토 마코토가 임명되었으며 그에 따라, 제 2차 조선교육령(第二次朝鮮敎育令, 1911 ~ 1938)이 발표되었으며, 보통교육의 수업연한이 6년으로 확대되었다.


“내선일체의 정신에 기하여 동일한 제도 하에 시설의 완벽을 기한다.”라는 이념적인 기반을 근거로 당시 정무총감이었던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郎)는 “일시동인의 뜻에 따라 차별철폐를 기하고 내지와 동일한 제도에 의하는 주의”라고 말하며 일본인과 조선인의 공학을 원칙으로 하는 보통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2차 조선교육령 세부적인 목표로 1928년부터 시행되어 1936년에 종결된 조선총독부의 일반 국민 교육 보급 진흥에 관한 제일차 계획’(朝鮮總督府ケル一般國民敎育普及振興スル第一次計劃)-1면 1교제 정책에 따라 조선인들의 6년제 보통 학교 취학률은 26%까지 향상되었고,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으로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등교육이 시작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문맹률
1910, 1915년도는 1920년도를 기반으로 한 추정치
1927, 1928년도는 KEAffairs의 추정치
1930년도는 <조선국세조사보고> 참고
그 외 자료는 동아일보 참고



그러나 이 시기에도 보통 교육(초등 교육)에 대한 수요는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의무교육이 실현되지 않고 학교 인프라가 적극적으로 충족되지 않아 1934년에는 2년제 간이학교제가 실시되는 등, 보통학교 입학난이 큰 사회적 문제로 야기되는 등의 문제점이 있었다. 역시나 문맹률도 상당히 높았다.



入學志願者(입학지원자)는 激增(격증)하야가되 敎育施設(교육시설)은 이에따르지 못하야 入學競爭率(입학경쟁률)이 漸漸(점점) 上向(상향)되게되어 이때부터 온갓 敎育部門(교육부문)의 敎育施設(교육시설)의 擴立(확립)이 要求(요구)되엇다. 이때 全朝鮮(전조선)의 初等學校(초등학교)-當時(당시) 普通學校(보통학교)級數(급수)는 500個校(개교)밖에 안되고 生徒總數(생도총수)는 10萬名(만명)內外(내외)에 지내지 못하엿다.... (중략) ...現在(현재)는 官公私立(관공사립)을 通(통)하야 小學校數(소학교수)가 3000餘校(여교)에 121萬(만)8377名(명)에 就學(취학)하고잇다. 그래도 志願兒童(지원아동)도 다收容(수용)하지못하는 關係(관계)로 義務敎育(의무교육)의 實施(실시)가 緊急(긴급)하게되엇으며 벌서 國民學校(국민학교)制度採用(제도채용)의 段階(단계)에 드러섯다. 이같이 20年間(년간)에 小學校(소학교)就學兒童(취학아동)은 10倍(배)以上(이상)으로 增加(증가)되엇것만 그대로 全就學(전취학)適齡兒童(적령아동)의 3割餘(할여)밖에 收容(수용)하지못한터이므로 敎育施設(교육시설)에 限(한)에 學務當局(학무당국)의 努力(노력)과 一般(일반)의 熱誠(열성)으로 明日(명일)의 새로운 計劃(계획)이더 要求(요구)되고잇다.


제 3차 조선교육령(第三次朝鮮敎育令, 1938 ~ 1943)에서는 보통학교의 명칭이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로 변하였고, 이에 따라 2차 조선교육령에서 실시하기로 했던 6년제 수업연한이 지켜지기 시작하였다. 또 일본인과 조선인간의 공학이 다시 한 번 더 강조되었다. 그리고 1936년부터 1946년까지 보통학교(소학교)의 취학률 60%를 목표로 하는 제이차 조선인초등교육보급확충계획이 세워졌다.


제 4차 조선교육령(第四次朝鮮敎育令, 1943 ~ 1945)
조선인들의 소학교가 국민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당시 10년을 계획했던 제이차 조선인초등교육보급확충계획이 6년으로 축소었다. 1942년도 12월에 징병의 목적이 내포된 의무교육제 실시 계획이 발표되었다. 이 계획은 1946년부터 조선에 의무 교육 제도를 실시하려고 하였다만 1945년에 해방을 맞게 되면서 실현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朝鮮總督府統計年報, 일제 강점기 조선의 취학 규모



일제 강점기 말 조선인의 보통학교 취학률은 전체 43% 남성의 경우에는 70%정도에 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체적으로 일제는 조선교육령 1, 2차 시기에는 조선인의 교육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가, 제 3차 조선교육령 시기부터 보통학교 취학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이 이유는 1935년 독일의 장군 Erich Friedrich Wilhelm Ludendorff(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집필했던 『총력전(Der Totale Krieg』의 영향으로 교육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주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皇國(황국)은 總力戰(총력전) 國家(국가)로서 전력증강의 길에 서 있는데, 전력의 근간은 사람이다. 사람을 육성하는 교육이야말로 전력증강의 大本(근본)으로서 總力戰(총력전) 國家(국가)의 기저를 형성한다. 무력전(武力戰)도, 생산전(生産戰)도, 나아가 그 근간인 체력전(體力戰)도, 사상전(思想戰)도, 과학전(科學戰)도 모두 교육의 노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새삼 교육의 국가적 중대함을 깨달았다.
倉澤剛, 『總力戰敎育の理論』(一默書店, 1944), 2쪽.


이러한 점을 바라볼 때, 일제 강점기의 교육은 전쟁을 위한 교육이론으로 교육을 전쟁의 도구로 바라보며 군국주의 체계에서의 식민지민 양성을 목적으로 행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무 교육의 탄생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 선언을 통해 한반도의 주민들은 광복을 맞게 되지만, 정치체계의 부존으로 인해 미국 군부에 의해 통치되는 군정이 3년 동안 실시되게 된다.


미 군정 하에서 오늘날의 교육부와 같은 당시의 기관은 학무당국으로 학무당국의 국장은 로카드(Lockard, E. L) 였는데 그는 포병 출신의 전투병과 장교였다. 전문 지식이 부족했던 그는 한국교육자문회(韓國敎育委員會)와 조선교육심의회(朝鮮敎育審議會)와 협의하면서 해방공간의 교육정책을 만들어 나갔다.


1945년 9월 17일 미국군 아놀드군정장관의 포고에 따라 군정부 학무당국에서는 일반명령 4호로 <신조선의 조선인을 위한 교육>이 포고된다. 이는 1945년 광복이후 처음으로 조선인에 대한 교육방침을 상세히 규정하는 문서이다.



이와 같은 사항들은 미 군정에 의해 1945년 9월 26일에 <제 6호 교육의 조치, 3 ~ 6쪽>를 통해 공식으로 공고된다.



HEADQUARTERS
UNITES STATES ARMY FORCES IN KOREA
Office of the Military Governor Seoul, Korea.


ORDINANCE NUMBER 6
29 September 1945


SECTION 1 REOPENING OF PUBLIC SCHOOLS
The public primary schools of Korea will reopen on Monday, 24 September 1945. All Korean children between the ages of six and twelve will register. The reopening of other public schools will be ordered in later directives.


SECTION 2 PRIVATE SCHOOLS
Private schools may reopen when they have obtained permission from the Bureau of Education.

SECTION 3 RACE AND RELIGION
There will be no racial or religious discrimination in the schools of Korea.

SECTION 4 LANGUAGE OF INSTRUCTION
The language of instruction in the schools of Korea will be the Korean language. Until adequate materials are available in the Korean language, foreign languages may be used.

SECTION 5 CURRICULUM
No subject will be taught or practice observed that is inimical to the interests of Korea.

SECTION 6 TEACHERS
All Korean primary school teachers will register immediately at the nearest educational office and hold themselves ready to begin work on Monday, 24 September 1945. All other Korean teachers will register at the nearest educational office between 24 September and 29 September 1945.

SECTION 7 SCHOOL BUILDINGS
All school buildings now used for other than educational purposes, except those occupied by United States Army Forces, will be vacated at once, cleaned and left in good condition for use as schools.


BY DIRECTION OF THE COMMANDING GENERAL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A.V. ARNOLD

Major GENERAL,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or of Korea.



<제 6호 교육의 조치>에는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일어났던 방식과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 primary school이라는 용어, 즉 초등학교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2. 민족과 종교에 따른 차별 없는 교육이 실시되었다.
  3. 조선의 이익에 반하는 교과목이 금지되었다.
  4. 교육의 목적 이외의 학교 건물의 활용이 금지되었다.
  5. 공립과 사립의 통합이 실시되었다.



해방 공간에 존재하던 다양한 학교는 신식 학교(보통 학교), 사립 학교, 서당 등으로 다양했고 이러한 학교를 일원화시키기 전에는 의무 교육을 실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에 행해졌던 교육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에 걸맞는 교육을 구체화 하는 것도 이 시기 교육의 과제였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 따라 한국교육자문회(韓國敎育委員會)는 교육 행정을 정리하는 것을 도왔고, 조선교육심의회(朝鮮敎育審議會)는 새 시대에 걸맞는 교육의 목표를 형성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오랜 숙고의 결과 조선교육심의회는 홍익인간이라는 건국 강령을 기초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교육이념로 처음으로 설정하였다. 1945년에는 처음으로 한글 전용으로 글을 쓰자는 운동도 생겨났다.




미 군정기 조선의 교육은 초등학교에 집중되었고, 그 외에도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었다. 예를 들면 기존의 교사 중심의 교육방식이 아동 중심의 교육방식으로 바뀌어 갔고 교과 중심의 교육이 경험 중심의 교육으로 변화하려 했다. 다만 그 가시적인 효과가 크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는 주로 듀이와 같은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을 중심으로 한 교육철학이 주로 다루어졌으며, 1946년에는 일제 식민지 교육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자는 새교육 운동이 진행되었다. 민주교육연구회(1946), 한국교육문화협회(1948), 새교육협회(1948), 아동교육연구회(1948)등이 새교육 운동을 주도해 나갔으며 조선교육(민주교육연구회), 교육문화(한국교육문화협회), 아동교육(아동연구회)와 같은 잡지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기반시설의 미비와 교원 수의 부족으로 의무 교육이 실시되지는 못했고, 미국식의 서구적 교육이 강요되는 양상도 띄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7월 17일날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제 1호>의 헌법 16조에 "모든 國民(국민)은 均等(균등)하게 敎育(교육)을 받을 權利(권리)가 있다. 적어도 初等敎育(초등교육)은 義務的(의무적)이며 無償(무상)으로 한다. 모든 敎育機關(교육기관)은 國家(국가)의 監督(감독)을 받으며 敎育制度(교육제도)는 法律(법률)로써 定(정)한다."라고 명시하였다.


이를 통해 의무교육 제도의 성문화가 이뤄졌으며 대한민국에서 의무교육이 실현되게 되었다.


당시 안호상 문교부 장관은 미 군정기에서 일어났던 서구식의 교육과 일제 강점기에 행해진 파행적인 교육, 그리고 북한에서 벌어졌던 사회주의적 소련식 교육 모두를 지양하며 새로운 민족주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1950년 6월 1일부터 의무 교육이 실시되게 되었는데 당해년도 6월 25일날 북한의 남침으로써 이뤄진 한국전쟁(the Korean War) 때문에 의무 초등교육이 내실화 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고, 1952년 한국전쟁이 휴전 처리되었을 때 전쟁 이전 학교시설의 85%가량이 파괴되어 그 어려움은 한층 고조되었다.


1951년의 취학률은 상당히 떨어져서 69%를 기록하는 등, 초등의무교육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요구되었고 이에 따라 이승만 정부는 1954년부터 1959년까지 학령아동의 취학률을 96%까지 상승시키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초등의무교육완성 6개년계획>을 실시하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는 교육예산의 80% 수준을 의무교육비에 배정하여 초등의무교육을 보편화 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초등의무교육완성 6개년계획>의 결과 1957년에 취학률은 91.1%까지 상승되었으며, 1958년 95.2%를 거쳐 종결년도인 1959년에는 96.4%라는 성공적인 결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한편 한국 전쟁으로 인한 학교시설의 붕괴로 인해, 이 시기 교육에서는 학급당 학생 수가 100명을 초과하기도 하고 2부제 및 3부제 수업을 실시하는 등 온전한 의미에서의 정상적인 의무교육이 실현되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교육에 필요한 재정을 해외의 원조에 의존했었으므로 이러한 열악한 상황은 계속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1970년까지의 문맹률 추이
1955년 값은 KEAffairs의 추정치
1945, 1948년은 국가기록원의 기록을 참고
1959년은 중앙교육연구소의 통계를 참고
1966년과 1970년은 통계청 지표를 참고


그러나 의무교육 실현을 위한 이러한 노력들로 인해 1945년 해방 당시에 12세 이상 인구 중 문맹률은 78%에 달하던 문맹률은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41.3% 빠르게 개선되었으며, 1958년에는 4.1%로 격감되었다. (통계기관에 따라 중앙교육연구소는 1959년에 22.1%, 경제기획원은 1960년에 27.9%, 내무부는 1959년에 13.7%로 통계적 차이가 있다. 재건국민운동본부의 통계에 따르면 1962년 9.5%라고도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당시인 1960년도의 문맹률은 경제기획원의 통계에 따르면 27.9%에 달하지만 실제로는 문맹률 감소의 추세로 보나 다른 기관의 비문해율의 정도를 보나 이보다는 9%가량 낮은 19% 정도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결국 이는 1960년 당시 국민의 20%가량은 글을 읽을 수 없는 문맹자들이었으며 신문과 같은 언론 매체의 고급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 계층은 이보다 더 적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의무교육의 시작으로 인한 취학률의 높은 증가는 전체 국민들로 하여금 기본적인 지식의 습득을 가능케 했으며 1960년의 4.19혁명과 이후의 이 민주화 운동에 있어서 민중들의 관심을 상기시키는 여론을 형성케 하였다.



해방 직전 식민지 교육에 접할 수 있었던 인구는 전체 인구의 14%에 불과하였고, 그 중 절대다수인 12%는 초등교육 졸업 이하의 교육을받았다. 즉, 전체인구의 1% 미만이 중등 또는 그 이상의 학력을 소지하고 있었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불행하게도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었으며,1950년부터 3년간의 한국전쟁으로 조금 있던 산업시설 또한 거의 파괴되었다. 자연 지리적으로 한국은 천연자원이 빈약한 국가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1950년대와 60년대에 한국의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한국은 경제와 교육에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단기간에 높은 성취를 이루어내었다.  이종재,『한국교육 60년 -성취와 과제-』, 63p, 2009



앞서서 언급했던 Dewey의 견해와 같이 민주적인 사회를 양성하기 위해서라면 "개별 집단의 흥미를 모두에게 공유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하는 것"은 가장 선결적인 요건이 된다.


전쟁으로 인해 학교시설의 대다수가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전후 복구 사업으로 초등 교육 분야에 특히나 집중적인 투자를 하였다. 또한 6.25전쟁이라는 국가적 혼란상황에서도 전시연합대학을 확충하며, 집권 기간 내내 당시의 개도국으로서는 유별날 정도로 해외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후에 이어질 산업화 시기에 활용될 수 있는 충분한 인력 풀(pool)을 형성하였다.



혹자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집권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건국 시기부터 4.19이전에 이르기 까지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체제의 유지를 위해 교육을 왜곡한 경우는 없었다. 조선 말과 대한 제국, 일제 하의 36년간의 총력적인 교육들을 통해 대한 민국에서는 이미 정치화된 교육을 실행할 수 있었던 충분한 이론사상적 기반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 것을 수행할 정치적 능력마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거부하고 경험주의적인 미국식의 교육방식을 도입하기를 끝끝내 고수하였다.



결국 이러한 동시기 다른 개발도상국과 비교해도 아주 두드러지는 교육에 대한 집중은, 의무 취학을 통한 문해력(文解力)의 대폭적인 증가(비문맹률의 감소)를 이끌어냈고 이는 민주사회와 산업화의 초석을 마련하는 토크빌 효과(Tocquevillean effect)였던 셈이다.


아마 여기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학교 교육에 대한 두터운 믿음, 즉 교육입국(敎育立國)이라는 그의 확고한 철학에 기반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60-70년대 민주주의 교육의 발전기


4.19혁명으로 인해 윤보선 내각이 형성되었지만 5.16으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제 5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이기 이전에, 청년 시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여 문경공립보통학교(지금의 문경초등학교)에서 4학년 학생들을 가르쳤던 경험이 있었던 교육자였다.



추가된 레이블은 위에서부터 한국, 필리핀, 태국
괄호 안은 건국 혹은 독립 년도
Secondary Education이란 중·고교 교육을 의미




1961년의 취임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중등 교육(Secondary Education)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1962년도에 각 도에 교육대학을 1개씩 설립하여 그간 한국교육의 고질적 병폐로 여겨졌던(일본인 교사들의 퇴출로 인한 교원의 전문성 약화 및 교사 1인당 학생 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를 시작한다. 또한 교육 행정적인 분야에서도 내각수반이 교육감과 국공립 대학 총장 등을 임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굉장히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교육정책들을 중앙집권적으로 일원화하기 시작한다.

교육정책학자들은 이 시기(1960-1980)를 교육의 양적 성장기로 말하곤 하는데 위의 <1970-2005 중등 교육 취학률>은 박정희 정권의 양적 성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학교 교육기회는 1960년대 후반부터 급속하게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1968년에 전격적으로 발표한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는 중학교 입학생수의 급속한 팽창을 이루는 기폭제가 되었다. 1969년 초등학교 학생의 중학교 진학률은 62% 정도였으나,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가 전국적으로 확대된 1971년에는 70%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중등교육 확대의 계기가 된 것은 1973년에 발표된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었다. 1974년 서울과 부산을 시작으로 실시되어 1980년까지 전국으로 확대 적용된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은 고등학교 진학자 수의 팽창을 낳게 되었고, 1970년의 20.3%에 머물렀던 고등학교 취학률이 1980년에는 48.8%로 급증하였다. 이후에도 고등학교 취학률 상승은 지속되어 1985년 64.2%, 1990년 79.4%로 이어졌으며, 중학교 및 고등학교 교육기회의 연이은 확대로 인해 한국사회는 중등교육의 보편화 단계로 진입하였다.



국가기록원의 나라기록의 경과 보고는 박정희 시대의 교육정책이었던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와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전기 중등교육과 후기 고등교육에서의 박정희 대통령의 집중적인 노력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체로 1968년 이후 이러한 노력은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데, 1968년 12월에는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되어 국민 교육의 목표와 국민의 이상상을 형성하게 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 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차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

이러한 정책적 기조는 1979년까지 이어지는데, 이러한 전반적 정책에 대해서는 하버드 대학의 William H. Overholt 교수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The South Korean/East Asian approach concentrates on giving the vast majority of the population jobs, income and education. That creates political stability and an economic foundation upon which a more sophisticated economy can be built. With an educated, middle class society, sophisticated modern politics becomes stable and relatively efficient. A strong economy and a stable polity in turn provide the foundation for geopolitical stature.

남한이나 동아시아식의 접근방법은 대다수의 국민에게 직업, 수입, 그리고 교육에 대한 기회를 주는 것에 집중했다. 이러한 방식은 후에 더 복잡한 사회경제적 상황이 발생해도 (국민의 대다수가 이를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교육받은 다수의 중산층으로 구성되어진 사회는, 복잡한 현대의 정치를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만들었고,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고, 안정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함을 통해 지정학적 위상을 드높이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In addition to building on a foundation of agricultural distribution through land reform (which of course long preceded his presidency) and self-help programs like Saemaul Undong, together with light industry, which distributed jobs to the broadest numbers of people, Park was a fanatical egalitarian, particularly in education. He preferred to close the best schools rather than to allow the emergence of a permanent narrow path to elite status. In the West this degree of egalitarianism is associated with socialist philosophies (like Mao Zedong’s) that are both anti-democratic and bad for economic growth. But the long-run consequences of Park’s egalitarianism have been good for both. His education-based egalitarianism created a broad, educated workforce. It created a broad market, where for instance a high proportion of the population became capable of buying a radio at around the same time, thereby creating a domestic market of maximum possible size. It also created a society where democracy could prosper, because an educated citizenry could understand the issues and an egalitarian middle class society would vote based on widely shared interests.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이전에 행해진 토지개혁과, 박정희 정부 초기에 행해진 경공업 진흥책, 새마을 운동과 같은 부분은 대다수의 국민에게 직업을 얻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교육 분야에 대해서 광신적으로 평등주의를 고집했는데, 그는 영구적인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 출현하는 걸 허가했다기보다는, 귀족적인 학교를 닫아버리는 걸 추구하였다. 서구의 관점으로 볼 때, 박정희 정부의 이러한 평등주의적 노선은 모택동(Mao Zedong)가 같은 사회주의적 철학에 관련되어 있었다고 볼 정도였으며 보통 민주주의 노선에 반대되고, 경제 성장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교육적 평등주의 노선의 장기적인 결과는 노동력의 광범위한 질적 향상을 이룩할 수 있었다. 또 이것은 계층 간의 차별을 없애 일원화된 시장을 형성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한국 인구의 대다수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라디오를 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고, 그를 통해 라디오에 대한 최대 규모의 수요를 만들어 집중적인 시장을 형성할 수 있었다. 평등주의적 교육노선은 또한 교육받은 시민들이 사회적 이슈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로부터 형성된 중산층들은 투표를 통해 보다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결국, 한국의 민주주의를 번성시켰다.

The success of this egalitarian approach contrasts sharply with the difficulties of more right wing societies like Thailand, where elitist education, restricted higher education, and a radically skewed income distribution have restricted the size of the educated work force, thereby constraining the size of the domestic market and the technological advance of the economy. Politically, a society like Thailand is far more divided and, because of the low average education, far more vulnerable to demagoguery. As a result, Thailand has stalled, as has the Philippines which suffers from a different kind of elitism. China has followed the examples of South Korea, Taiwan and Singapore in building a foundation of agricultural reform and universal literacy; reformist China has done less than South Korea and Taiwan to smooth the income distribution and ensure a sense of social justice, but it is far closer to the Korean model than to the unconstrained elitism of Thailand and the Philippines.

평등주의적인 한국 교육의 성공은 보다 차별적이었던 태국과 비교해 보면 더 명확하게 대조되는데, 태국은 엘리트주의적이고 엄격한 고등교육을 실시했고, 그 결과 소득격차가 확대되었으며, 결국 교육받은 노동자들의 양이 상당 부분 제한됨으로써 내수시장의 확대과 경제적 고도화를 어렵게 만들었다. 정치적으로도, 태국과 같은 나라는 평균적으로 낮은 교육수준으로 인하여 상당히 분열되어 있고 선동에 굉장히 취약했다. 그 결과 태국의 발전은 다른 종류의 엘리트주의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필리핀처럼 굉장히 지지부진하게 진행 되고 있는 중이다. 중국은 남한, 대만, 싱가포르를 본보기로 농업 개혁과 국민 전반적인 문맹률 감소와 같은 이런 정책들을 따라가고 있다. 개혁 중인 중국은 소득 분배와 사회적 정의 구현에 대해서는 남한이나 대만에 미치지 못하지만, 엘리트에게 모든 것을 부여했던 태국이나 필리핀보다는, 평등주의적인 한국의 모델에 가깝다는 것은 자명하다.

Park personally called young Korean academics (for instance my good friend Kim Sejin, who was at the time an obscure assistant professor of political science at the University of Kentucky) and encouraged them to return to Korea to build their country. He clustered them in think tanks, focused on everything from economics to education to the arts, where they were paid far more than professors and where their advice was highly valued by the government, and then, after training them to analyze policy decisions, transferred them into high government positions.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젊은 한국인 학자들을 데려 왔다. 예를 들면 내 좋은 친구이자 Kentucky 대학의 무명의 정치 과학 교수였던 김세진이가 그랬다. 젊은 학자들에게 한국으로 돌아와 그들의 국가를 건설할 것을 도울 것을 장려했다. (마치 오늘날의 싱크탱크 집단처럼) 그는 젊은 학자층을 군집화했으며 경제, 교육, 기술을 막론하고 한국의 모든 분야에 침투시켰고, 그들에게 정책을 분석하는 방법들을 훈련시키고, 정부의 높은 직책을 파격적으로 배분하였다. 결국, 이러한 우수한 인력들은 국가의 정책 수립에 아주 가치있게 활용될 수 있었다.

Here again South Korea, along with Taiwan, has served as a model for China. China has recently begun elevating an expanded set of such practices almost to the level of an ideology. Globalization, we are now told by the Chinese, has three phases, the globalization of industry led by Britain, the globalization of finance led by the United States, and the globalization of talent which China’s leaders hope will be led by China. Here Park went far beyond his Japanese predecessors, and the difference is a major part of the explanation why South Korea continues a rapid ascent in global stature while Japan is suffering a seemingly inexorable decline.
China today has more students and officials studying abroad than any other country. South Korea has proportionately more students abroad than any other country. Japan’s numbers are low and declining. Post-Park South Korea has continued to build on Park’s legacy in this regard, and China, having started by emulating South Korea, is now going far beyond it as part of the core strategy for future global leadership. (중략)
China’s success is based on emulation of Taiwan, and more importantly Park’s South Korea, cannot be overstated. In turn, many other countries are drawing lessons from China’s development, thereby extending the legacy of Park to much of the developing world.

한국과 대만은 중국에게 새로운 성장 모델을 보여줬다. 중국은 최근에서야 이러한 정책들을 추진하고 확장시키기 시작했는데, 거의 사상적인 수준으로 추종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중국인들에 따르면 세계화는 세 가지 단계를 겪는 중인데, 영국에 의해 진행도니 산업적 세계화, 미국에 의해 진행된 금융의 세계화, 중국의 지도자들이 희망하는 중국에 의해 지도될 인적자원의 세계화가 그러하다.
여기에서 박정희의 노선은 더 이전에 일본이 추구했던 노선과는 거리가 있는데, 이 차이는 일본이 멈출 수 없는 추락을 겪는 동안에 왜 남한이 지속적으로 빠른 국제적 위상의 증대를 보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해 준다.
오늘날의 중국은 세계 그 어떤 나라보다도 많은 해외 유학생들과 외국에서 공부한 정부 관료들을 보유하고 있다. 남한 또한 다른 국가들보다 비교적 많은 학생들이 해외에서 공부중이다. 일본의 국외출국한 해외유학생 수는 굉장히 낮으며 그 또한 감소하는 중이다. 박정희 시대 이후에 한국은 계속해서 이 분야의 박정희의 관점과 유산을 이어받고 있으며, 남한의 이러한 모델을 모방하는 것은 이제 미래의 글로벌 리더십을 위한 핵심적인 전략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중국의 성공이 대만과, 특별하게 말하자면 박정희의 남한에 대한 모방이라는 기초 하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조 지나치지가 않다. 차례로, 많은 국가들이 중국으로부터 교훈을 받고 있으며, 이는 결국 박정희의 유산을 개발중인 국가들에게 확장시키고 퍼뜨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중략) Like all great leaders, Park had important weaknesses and failures along with his successes. He built solid, enduring government ministries and think tanks, and a solid, enduring chaebol system, but he did not institutionalize a political party. His efforts at globalization were slower than optimal and South Korea continues to run risks of falling behind more open economies and societies like China. (Here I of course refer to openness regarding trade, investment, and talent, where China is far more open, not to political freedoms like speech, press, and the general flow of information, where South Korea is far more open.) His excessive focus in the late 1970s on chaebol-built heavy industry caused inflation, an unbalanced economy, and weakness among the small and medium enterprise sectors that are vitally important for employment and innovation. 

다른 위대한 지도자들도 그랬듯이, 박정희 역시 성공과 대비되는 약점과 실패가 있었다. 그는 견고하고 뛰어난 정부 부서와 씽크 탱크 집단, 효율적인 재벌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정당 정치를 제도화하지는 않았다. 최선의 결과를 창출해낼 수 있는 세계화에 대한 움직임은 상당히 낮았으며, 한국은 아직도 경제 개방과 사회 개방에 대해 중국처럼 뒤떨어질 위험이 있다. (단 여기서 말하는 개방이란 무역, 투자, 인재에 대한 개방을 의미한다. 정치적인 표현, 언론 그리고 정보의 자유에 있어서 남한은 중국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다.) 박정희 집권의 말기인 1970년대에 재벌 중심적인 중화학공업은 인플레이션을 야기했고, 경제적 격차를 확대시켰으며, 고용과 혁신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잇는 중소기업 섹터의 약화를 불러일으켰다.


William H. Overholt 교수의 <Park Chung Hee’s International Legacy>는 기존의 산업적인 측면에만 집중하거나 박정희의 유신 독재 시절에 대한 비판으로만 일관되던 여러 주장들과는 사뭇 다른데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매우 평등주의적인 교육 정책이 중산층의 성립과 민주주의의 여건인 사회적인 공론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William H. Overholt 교수의 주장처럼, 2차 대전 후의 신생독립국들 중 1960년에서 1970년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만큼의 높은 중등 교육의 취학률 증가세를 보인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대한민국 이외의 나라와는 다르게 한국은, 당시 신생 독립국들 사이에서 유행에 가까웠던 엘리트주의적 교육을 지양하고, 평등주의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1962-1979 교사 1인당 학생 수>
각 년도 문교통계연보


박정희 정부는 내국세의 12.98%를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재원으로 확보하는 규정을 신설함으로써 이승만 정권과는 다르게 교육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으며, 경제개발 정책의 성공으로 인한 내국세의 증가가 직접적으로 교육에 대한 양적, 질적 성장을 견인해 낼 수 있게 하였다.


<1962-1979 학급 당 학생 수>
각 년도 문교통계연보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와 고교 평준화라는 평등주의적인 집중 아래에서, 1970년대가 되자 교육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시각은 더 확장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국가의 교육에 대한 지원도 점차 확대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초, 중, 고교 취학률의 폭발적인 증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급 당 학생 수가 일정 비율 하에서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충분히 확인될 수 있다.


<1970-1980 학력별 인구 비중>
통계청

<1970-1980 학력별 인구 비중>을 보면 1970년대 25.9%에 해당하는 무학력자들의 비중이 10년 사이에 13.1% 가량 줄어들었고 중등교육 인구 비중이 1980년대에는 42.2%로 16%가량 급격히 확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80 민주주의 교육의 수립기


1980년대부터는 초등, 중등 교육(Primary and Secondary Education)에서 과밀학급 완화, 과대 학교의 분리, 2부제 수업의 해소 정책이 실시되었으며, 이에 따라 행정적인 내실화가 크게 일어났다.


<1980-1987 초, 중, 고교 교원 1인 당 학생 수>

1970년도 박정희 정부에서 대폭적으로 이뤄졌던 중등교육의 광범위적인 기회 확대는 1980년도의 고등교육(High education)에 대한 수요를 견인하였다. 그러나 고등교육은 이 대폭적인 수요를 따라갈 수 없었고, 그 때문에 대학별 혹은 국가차원의 입학시험이 경쟁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학부모들이 사교육비에 과대 투자를 하기 시작했으며 전두환 정부는 이러한 과열된 입시경쟁을 막고, 대학입학의 정원을 증대시키기 위해 <7.30 교육개혁조치>를 실시하였다.


자녀들의 대학 진학이 그 가정의 결실이라고 여겨지던 이 시기에서 7.30 교육개혁조치는 다음 몇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1. 중등 교육이 내실화가 완료되었음을 상징
2. 대규모의 중산층이 양성되어 고등 교육에 대한 수요층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
3. 산업화가 종결 단계에 오름에 따라, 구조적으로 필요해진 다양한 분야의 인력 창출 시도
4. 교원대학 및 4년제 교육대학의 출범으로 교원의 전문성 증대 노력
5. 과열된 사교육 억제와 대학입학 정원의 폭발적 증대로 빈부격차 없는 평등 교육을 위한 시도


흔히들 독재적 정권으로 여겨지곤 하는 전두환 정권이 평등 교육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상당히 아이러니하게 여겨질 수 있겠지만, 1985년 2월 중학교 의무 교육이 도서 벽지에서부터 실현되는 등 교육분야에서는 아주 신경질적으로 평등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모습이 분명히 눈에 띄고 있다.


1985년 도서 벽지에서부터 시작된 중학교 의무 교육의 시작은 1986년에 도서 벽지 중학생의 입학금 및 수업비 면제 등으로 이어졌고, 1987년에 도서 벽지의 중학생 25만명에 대한 의무 교육이 우선적으로 실시되었다.


<1980-1987 고등 교육 통계 변화 추이>
자료 : 교육통계서비스 대학통계 연도별 대학 개황, E-나라지표 취학률 및 진학률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 시기를 통해 대거 양성된 중산층은 William H. Overholt의 지적처럼 고등 교육의 재정을 충당할 수 있는 동시기의 최대 수요층으로 변모하였으며 이에 따라 고등 교육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에 발맞춰 전두환 정부에서는 <7.30 교육개혁조치>를 통해 입학정원의 대폭적인 확대를 실시하였는데 특히 1980년에서 1981년에 이르는 1년 사이에 13만 2천명의 대학정원(1980년 기준 약 33%)의 증가가 있었고 그 이후로도 1985년에 이르기 까지 23%, 17%, 13%, 7%가량, 매 해마다 약 10만명 가량씩 증가함으로써 고등교육의 기회가 대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7.30 교육개혁조치>에 포함되어 있던 대학정원제의 영향과 학생 운동의 확대로 인해 낙제자, 중퇴자들이 속출함으로써 입학자들의 수에 비한 졸업자 수의 증가는 비교적 더딘 편이었다. 사회각층의 비판을 받던 대학정원제는 1984년 대학 졸업이 자율화 됨으로써 그 짧은 기간을 마감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의 대학교육에서는 이데올로기적인 운동이 아주 성행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공산주의 이론, 해방신학, 종속 이론, 네오 마르크시즘 등 좌경화된 급진적인 이론이 대학생, 젊은 지성인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었고, 이러한 이론에 자극 받은 학생운동들은 정치적인 명분이 빈약했던 당시 정부와 대한민국의 우방국이었던 미국에 대한 비판을 극도로 민감하게 만들어 부산 미 문화원이 방화되는 등 이데올로기적인 조류가 교육 전반이 침투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불어 충분한 사전 논의 없이 실행된 대학정원제에 따른 낙제자, 중퇴자 들이 속출하여 사회 불만층으로 변모함으로써 학생 운동에 걸친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비록 대학 정원제가 충분한 사전 논의를 거친 책임 있는 정책이 아니었고 대학 졸업생의 양산화 정책이라는 전문가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러한 계층들이 추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근본적인 주도층으로 기능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결론


100년에 달하는 한국의 근대 교육은 교육기회의 확대라는 지상명령을 하에서 실시되었다. 1945년 해방 전까지 한국의 교육적 발전은 미비한 편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 시기에 초등 교육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는 중등 교육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전두환 대통령 시기에는 고등 교육에 대한 투자를 통해 단계적인 측면에서 양적, 질적인 성장을 거둘 수 있었다.


교육기회의 확대 과정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교육은 신경질적으로 평등주의적인 측면에 집착했으며, 이는 '모든 사람을 위한 저비용 최대화'정책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1945년 해방 후 및 한국전쟁으로 인해 모든 교육기반시설이 파괴된 암흑기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이며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할 수 있는 인력풀을 형성하는 데에 막대한 기여를 할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일제 강점기에 억눌렸던 교육 분야에 대한 무한(無限)한 투자를 통해 최대한의 유효수요를 창출해 준 국민적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재체제 하에서만 가능했던 고강도의 정치적 능력을 교육이라는 올바른 부분에 집중하려고 했던 정부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교육 기회의 확대와 민주화의 실현은 1958년 초등의무교육의 실시와 1960년 이승만 정부의 몰락, 1985년 제한적 중등 의무 교육의 실시와 1987년 군부 독재 체제의 종식 등 시기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한국사회의 패러다임적 전환이 산업화 이후 축적된 경제력으로 교육에 투자함으로써 우수한 인재들을 양성하고 이들은 사회에 민주화를 요구함으로써 이뤄졌다는 산업화-교육 기회 확대-민주화 이론에 상당한 설득력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KEAFFAIRS의 연구 보고서


일본 유행어에서 뽑아본 교육, 청소년문화분야 신용어

- 중요 표현에는 굵은 글꼴을 사용해 강조.

1. カゲレン : 카게렌 - 몰래 연습하다 
의 미 : 몰래 연습하는 것 
해 석 : 
새로 나온 곡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라오케에서 춤을 추면서 너무나도 쉽게 노래를 잘 소 화시키는 녀석이랑, 볼링장에서 "요즘 별로 볼링하지 못했어"라면서 아주 볼링을 얄미울 정도로 녀석들과 같이,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숨어서 연습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임. 

4. モグリ:모구리 
의 미 : 도강하다(モグる-모구루). 도강 
해 석 : 
"잠입하다, 숨어들다, 잠수하다"란 뜻의 <潛る-모구루> 에서 파생된 말로, 도강, 즉 수업 을 훔쳐듣는 걸 말한다. 

5. タメ: 타메 
의 미 : 같은 나이, 지위, 동격, 동급생 
해 석 : 
1970년대에 많이 쓰여진 "타메도시(タメドシ)"란 말이 줄어든 것. 

★타메오 하루(ためを 張る):동격이다 


★타메구치오 키쿠(ため口を利く): 반말하다 


6. さぼる : 사보루 

의 미 : (학교)수업을 도망가다, 일을 방관하다, 안하다, 땡땡이치다 
해 석 : 
"sabotage-사보타쥬"란 불어에서 파생된 말로, 일하지 않고 놀고 있는 상태나, 학교 수업 을 도망가는 걸 의미한다. 

7. ノ-ティ- : 노티 

의 미 : : 학생시절의 우정의 척도 
해 석 : 
학교 수업중에 노트정리를 잘해 그 정리한 노트를 잘 빌려주는 학생을 일컷는 말로 노트 를 잘 빌려주고 안빌려주는것이 친구사이의 우정을 정하는 척도가 되었다. 

8. 助交際 (えんじょこうさい, 엔조코우사이) - 원조교재 

의 미 : 여학생이 용돈을 받고 아저씨들과 교제하는 것 
해 석 : 
여학생은 돈이 필요하고, 아저씨들은 젊은 여자얘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절묘한 수요 와 공급이 맞아 떨어져 지금 유행하고 있지만, 여기에 맛을 들여 몸을 망치다 보면, 결국 원조교제에서 사창가로, 또는 애인에서 첩으로라는 등식의 인생 길로 접어들게 됨. 

이것은 젊은이들의 용어라고 하기보다는 한마디로 사회문제이다. コギャル(고걀=여자 고 등학생을 지칭하는 말)의 고소득원의 비결은 원조교재에 있는 것 같다 


9. コギャル : 고걀 - 고등학교 여학생들 

의 미 : 고등학교 여학생들 
해 석 : 
원래「ギャル(girl)」이라고 하는 표현은 젊은 아가씨를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만, 平成 (헤이세이)초기에 디스코등의 종업원이 고교생이 입장했을 때에, 일반 아가씨들과 구별 하 기 위해 「コ-ギャル」(高校生のギャル)라고 부른 것이 시초인 것 같습니다. 이 이론에 의할 것 같으면, 최근 중학교 여학생을 가리켜 コギャル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신세대용어에 어긋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 잘못된 용법이「マゴギャル」 등이라고 하는 표현을 낳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マゴ」는 "손자"라는 뜻임. 

10. コシャネラ- : 코샤네라 

의 미 : 여자 중, 고등학생들이 샤넬과 같은 고가 브랜드 상품으로 치장하는 현상. 
해 석 : 
일본에서는 중고생들이 고가 브랜드 제품의 가방이나 악세사리를 하고 다닌다. 무척 비싸 지만 몇 달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가볍게 핸드백 하나를 산다. 이런 세태를 보고 약간 비꼬듯이 하는 말. 

11. スク-ルセクハラ : 스쿠루세쿠하라 

의 미 : 학교 교육현장에서 교사들이 학생을 성적(性的)으로 희롱하는 것을 일컫는 말. 
해 석 : 
일부 질이 좋지 않는 교사들이 학급 활동 지도라는 명목하에 학생의 몸을 더듬는 등의 접 촉을 하거나 성적언행을 하여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요즘에도 일본의 방송매체나 신문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말이다. 
- 조선 일보 기사 참고 "성범죄·성매매 교사 해마다 증가… 친척·女경찰 대상 성범죄 사례도"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2&sid2=250&oid=023&aid=0002443605

14. アブラ- : 아부라아 
의 미 : 얼굴의 기름이 많이 나와서 번들거리고 있는 모습이나, 그런 사람을 일컫는 말. 
해 석 : 
"아부라(あぶら)"라는 말은 기름이라는 일본어로 고유어로 쓰이던 말을 조금 말을 길게 빼면서 발음을 해서 다른 의미의 단어를 만들어 냈다. 얼굴기름이 많은 사람을 놀리는 말 로도 쓰이는 단어이다. 

33. プリる : 푸리루 
의 미 : 스티커사진 찍다 
해 석 : 
プリントクラブ(프린트클럽)--->プリクラ(푸리쿠라)--->プリる(푸리루) 
프린트클럽, 즉 우리말대로는 스티커사진. 
이 말을 줄여서 "푸리쿠라"라고 한다. 
이 "푸리쿠라"의 푸리"プリ"와 동사의 루"る"를 붙여 동사형이 된 것. 

36. 超MSA 
의 미 : "굉장히 쓸쓸하고, 만나고 싶다" 의 강조어 
해 석 : 
とても(돗데모):굉장히 ---超 
マジ(마지):정말로 ---M 
寂しい(사비시이):쓸쓸하다 ---S 
會いたい(아이따이):만나고싶다 ---A 
합쳐서 とてもマジ寂しい會いたい ---超MSA 

59. ういてる : 우이테루 
의 미 : 주위와 어울리지 못하다. 튀다 
해 석 : 
뜨다의 "浮く(우쿠)"의 진행형. 
혼자 떠있다는 의미에서 '튀다'란 의미로 변화된 단어. 
분위기 못맞추는 튀는 사람을 뜻한다.  

61. イ-マ- : 이마 
의 미 : 심야(深夜)족. 
해 석 : 
사람들이 잘 시간에 밖에서 노는 젊은이를 뜻한다. 

62. コボ-イズ : 고보이즈 

의 미 : 고등학교 남학생 
해 석 : 
여고생들을 지칭하는 コギャル(고걀)에 대비되는 말. 
64. シリコンカラ- : 시리콘카라 
의 미 : "정보 산업 종사자"를 일컫는 말 
해 석 : 
인터넷이나 컴퓨터등 정보산업에서 두뇌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난해한 수식(數式)을 빠르게 해석하는 반도체(シリコン)와 같다고 하여 붙혀진 말이다.화 이트칼라(사무직) 블루칼라(생산직)와 함께 같은 맥락의 단어이다. 

65. おやじキッド : 오야지키드 

의 미 : 애어른. 
해 석 : 
가라오케, 골프, 디스코, 요리 등 어른들이 하는 취미를 즐기는 어린이를 뜻한다. 
おやじ--오야지 : 어른. 
キッド--영어 KID. 

69. パソ戀 : 파소고이 
의 미 : 컴퓨터를 이용한 사랑. 
해 석 : 
パソコン(파소콘-퍼스널컴퓨터)의 'パソ(파소)'와 '戀(こい, 코이)'의 합성어. 
한국영화 '접속'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처럼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메일 교환, 채팅 등 을 통해 사랑에 빠지는 것을 뜻한다.  

71. キティラ- : 키티라 
의 미 : 키티 캐릭터 인형을 좋아하는 사람. 
해 석 : 
여고생부터 직장 여성, 주부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는 'Hello Kitty' 캐 릭터. 
문구를 비롯해 생활용품, 전자제품,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키티 캐릭터의 종류는 다양하다. 

72. 地雷 : じらい 

의 미 : 멋없는, 분위기 깨는 사람. 
해 석 : 
地雷(じらい)는 우리말로 "지뢰". 
아마도 우리가 쓰는 비슷한 표현으로는 "폭탄"일 듯... 

76. 失業會社 : 시츠교카이샤 
의 미 : 실업자들의 심리적 안정과 친목도모, 재기를 위해 만들어진 회사 
해 석 : 
1999년의 유행어. 우리만큼이나 경제불황이 심각한 일본. 그만큼 일자리를 잃고 재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도 많다. 실업회사는 이런 상황에 대응하여, 인재파견회사가 구조 조정되어 재취업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시작한 서비스이다. 

실직자들에게 책상과 퍼스컴을 갖춘 사무공간을 유료로 제공하는 서비스. 회사를 그만둔 비즈니스맨의 대다수가 "갈 곳이 없다" "친구가 없다"라는 고민을 갖고 있다는데 착안하 여, 회사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줌으로써, 정신적인 부담감을 없애는 것이 목적이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으며, 사무실 안에 상당실과 구인 정보 코너가 있다. 요금은 3개월 11만엔. 구조조정 바람에 편승한 비즈니스로, 이것 역시 실업회사에 얹혀지낸다는 생각을 하는 중고년층 실직자가 많다고 한다. 


77. 通三族 : 코-츠-산조쿠 

의 미 : 야타족, 폭주족을 통칭해서 가리키는 말. 
해 석 :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 차를 사용하는 <ナンパ族(난파족)>=야타족, 오토바이로 폭주행위 를 하는 <ロ-リング族(롤링족)>, 400미터 직선도로에서 속도를 다투는 <ゼロヨン族(제로 욘족)>을 가리킨다. 
도쿄만 지역에 이러한 교통3족이 자주 출몰하기 때문에 이 곳 경찰들은 단속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도쿄만 지역은 밤에 자동차 없이 다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폭주족들이 애용 (?)하는 곳이 되었다 

80. ジベタリアン : 지베타리안 
의 미 :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번화가에서 아무렇게나 앉아 있는 젊은이들. 
해 석 : 
[尻ペタ族(시리페타족)]이라고 한다. 도쿄 시부야, 신주쿠 등의 편의점, 패스트푸드점의 입 구와 계단 등에 엉덩이(尻=しり=시리)를 대고 털썩(ぺったりと, 펫타리또) 주저않아 있는 10대 중반에서 20대 초의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늘 진바지를 입어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신경쓰지 않으며, 밖에 앉는 것을 별로 부끄럽 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1995년 무렵에 빅히트했던 유행어로, 당시의 이런 젊 은이들을 표현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가 이 말이 나오자마자 큰 인기를 얻었으며, 지금까 지도 자주 사용된다. 

82. 成田離婚 : 나리타리콘 
의 미 :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이혼하는 커플 
해 석 : 
1990년대를 대표하는 유행어 중의 하나. 맞선, 결혼식, 피로연, 허니문이라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신혼부부가 나리타공항에 내림과 동시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현상. 
신혼여행 중에 남편이 마더컴플렉스였음이 판명되거나, 남편이 영어 한마디 못하는 것을 아내가 부끄러워한 것 등 원인은 다양하다. 이 말은 급속한 파급력을 지니면서 '成田退 社(나리타타이샤)' '成田破局(나리타하교쿠)' 등의 파생어를 낳기도 했다.  

84. なつマン : 나츠망 
의 미 : 어릴 적 가슴 설레며 읽었던 추억의 만화. 
해 석 : 
1992년에 생긴 말. 누구나 어린 시절 엄마가 찾으러 올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던 만화가 있을 것이다. 은하철도999, 요술공주 세리, 철완 아톰 등등....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만화를 가끔 떠올릴 때가 있는데, 이런 만화는 찾으려 해도 좀처럼 찾기가 어렵다. '나츠망'은 일본에서 1990년대 초부터 어른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추억 의 만화들의 재출판붐이 있었고, 그 때 재출판된 추억의 만화들을 '나츠망'이라 부르면서 유래된 말이다. 

86. ヤンババ : 양바바 
의 미 : 결혼도 빨리하고, 애기도 빨리 낳은 젊은 엄마 ' 아줌마. 
해 석 : 
'젊은'의 Young 과 '아줌마'의 ババ(바바)의 합성어. 구체적으로는 10대에 결혼, 애기를 낳고, 30대에 벌써 아줌마가 된 여성. 
이미 일본에서는 10대들의 결혼이 일반화 되고 있으며, 급기야는 17세에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16세에 결혼해 아기를 낳아서 33세에 손자, 손녀를 볼 경우도 있다고... 

88. プリティ-ン : 푸리틴 
의 미 : 5세부터 12세까지의 소녀. 
해 석 : 
원래는 미국에서 12세 이하 소녀들을 부를 때 쓰는 말. 
이 푸리틴의 인구는 Teen소녀(13세~17세)의 인구보다 16%가 더 많으며, 이 푸리틴을 대 상으로 한 화장품이나 악세사리의 판매율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89. ブッチする : 부치스루 

의 미 : (학교)수업을 도망가다, 일을 방관하다, 안하다, 땡땡이치다, 약속을 깨다. 
해 석 : 
어원은 ブッチギル(부치기루)로, 비슷한 말로는 フケル(후케루), さぼる(사보루) 등이 있 다. 

99. チャパツ: 챠파츠 
의 미 : 금발로 염색하는 것 또는 그 머리. 
해 석 : 
'茶髮'이라고 쓰며 원래 '양키'라고 불리는 소위 날라리들이 시작한 것으로 지금은 유 행의 원조가 되고 있다. 

100. ングロ : 곤구로 

의 미 : 피부를 검게 태운 사람을 지칭. 
해 석 : 
1999년에 유행했던 말. 얼굴이 검다는 의미에서 유행한 간구로(ガングロ)를 능가할 정도로 검다는 뜻. 아버지 세대와 남자들에게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지만 얼굴이 검은 여 학생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표정을 알 수 없을 정도의 쵸코렛빛 피부에 하얀색 립스틱과 눈화장, 은색 또는 금색으로 염색한 머리가 특징이다. 야만바(ヤマンバ)라고 불린 적이 있다. 그러나 2000년 들어서부 터 점차 이런 화장법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102. ナピ-/クチピ- : 하나피/구치피 
의 미 : 코와 입에 한 피어싱 
해 석 : 
1999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 코 옆에 구멍을 뚫고 피어스를 하는 것이 [하나피(ハナ ピ-)], 입술을 뚫고 피어스를 하는 것이 [구치피(クチピ-)] 
예전에는 도쿄의 신주쿠나 시부야 등 번화가에 나가야 이런 젊은이들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피어싱이 일반화되어 일반 전철에서도 하나피나 구치피를 한 젊은이들을 쉽게 찾 아 볼 수 있다. 

107. オヤジ狩り : 오야지카리 
의 미 : 고등학생 여러 명이 모여 중년남자을 습격해 돈이 될만한 것을 빼앗는 행위. 
해 석 : 
언뜻 보기에 약해 보이는 중년 남자나 술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을 습격하여 시계나 지갑을 빼앗는 행위를 일컫는 말. 게임을 즐기는 세대들이 나쁜 행동이라는 인식도 없이 게임을 즐기는 감각으로 행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 

108. ?シングル : 리싱그루 
의 미 : 독신주의자 였지만 상황에 따라 결혼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일컫 는말 
해 석 : 
독신을 고집했던 사람들이 30대 중반이 되어,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 친구들이나 주변 사 람들로 인해 결혼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바뀌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현대 독신주의자 들은 대부분 카리싱그루(?シングル)상태라고 한다. 

111. 家庭版ODA : 카테이반ODA
의 미 : 가족중 센스가 부족한 아버지에게 자식들이 젊은 사람들의 동향을 가르쳐주거나 패션 감각을 코치해주는 것을 말한다. 
해 석 : 
'ODA'의 본래 의미는 '정부개발원조'로 정부가 개발도상국에 원조를 해주어 스스로 일어 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이 가정판 이라는 말과 합쳐져 가정에서 시대 적인 감각이 떨어지는 아버지에게 젊은 사람들의 감각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113. ケ-タイ語 : 케타이고 
의 미 :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 사용하는 특수한 표현방법을 일컫는 말. 
해 석 : 
휴대폰은 액정화면이 작아 문자를 보낼 수 있는 수가 한정되어 있고 문자키를 몇 번이나 눌러 입력해야 하는 불편이 있다. 때문에 간단한 표현으로 의미 전달을 위한 줄임 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 シブ六シュウ(澁谷に六時に集合) 
- 시부야에 6시까지 집합 

114. ゲロゲロ : 게로게로(짜증나!) 
의 미 : 싫은 느낌을 받을 때 사용하는 말로 초, 중학생이 주로 사용하는 말이다. 
해 석 : 
만화 대사에서 나온 말로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미 일상용어가 되어버린 말이다. 수업 중 에 선생님이 숙제를 낸다든지 싫어하는 선생님을 만났을 때 사용하는 말로 짜증스러움이 섞인 말이다. 

116. 早朝族 : 소-쵸-소쿠 
의 미 : 취미와 공부를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말 
해 석 : 
1999년부터 사용된 말. 이제까지의 밤생활(?)을 끝내고 취미나 공부를 위해 아침 일찍 일 어나는 젊은이들을 말한다. 출근 전 시간을 이용해 주 1회 6시 30분부터 도내 패스트푸드 점에서 스터디 모임을 열거나, 어학 교실에 다니거나 한다. 
비즈니스맨들의 교류는 주로 밤 시간에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그냥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 생활할 경우, 자신을 풍부하게 할 수 없다는 반성에서 자신의 자유로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일찍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119. チョベリバ : 쵸바리바 
의 미 : 최악의 상태를 의미하며 여자고등학생(고걀)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이다. 
해 석 : 
초(超) very bad 의 준말로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주로 사용하며 역으로 매우 좋을 때는 チョベリグ(초(超)very good)라고도 한다. 

122. TIPS 
의 미 : 부모에 의존하는 자녀들 
해 석 : 
1991년의 유행어. tiny income parents support의 약자. 적은 수입으로 부모에게 원조를 받는다는 뜻. 스폰증후군(スッポン症候群)이라고도 한다. 취직해도 월급이 작다는 이유로 부모로부터 여전히 용돈을 받는 자녀들을 가리킨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20대, 30대가 되어도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독신자를 가리켜 < 파라사이트 싱글(パラサイト シングル)>이라고 하는데 비슷한 뜻이다 

123. ネットおかま : 넷토오카마 
의 미 : 채팅 중에 여자 행세하는 남자 
해 석 : 
1993년부터 사용되는 말. 최근 들어 활발해진 PC통신에서 여자 행세를 하는 남자를 가리 킨다. 문자만으로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확인할 수 없는 데다 아직 PC에 능통한 여성이 적다는 상황. 여성으로 행세하면 상대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이용해 채팅 중 여자행 세를 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생긴 용어다. 

예. "요즘 PC통신을 했는데 희한한 여자를 만났어" "에? 어떤 말을 했는데?" "첫사랑부터, 일 얘기까지 여러 가지..." "상대의 반응은?" "글쎄.. 별다른 반응은 없었는데?" "이상한데... 넷오카마일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나 원래 친구가 별로 없거든..."  

125. 超人類 : 쵸진루이 
의 미 : 독특한 가치관을 가진 젊음이들을 가리키는 말
해 석 : 
1999년부터 사용된 유행어. 길에서 춤을 춘다거나, 직업관 등이 윗세대와는 다른 젊은이들 을 가리키는 말. 이런 젊은이들이 사회에 속속 등장하면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이들은 ジベタリアン(지베타리안)라고 하는 젊은이들처럼 아무 데나 털썩 앉거나 차안에서 태평하게 화장을 한다거나, 남녀가 껴안고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휴대전화와 편의점 등이 생활에 침투시킨 편리함 속에서 자란 세대들이기 때문에 사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을 특징짓는 몇 가지 것은 '자기중심' '두려운 것이 없 다' '방약무인'이다. 진로도 결정하지 않고, 취직도 하지 않은 채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 는 이들의 행동은 노력을 싫어하는 풍조와 연결된다. 
20년 전에 일본에는 <신인류>라는 용어가 등장했는데 <초인류>는 <신인류>의 스케일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126. 自爆男 : 지바쿠난 
의 미 : 연애관계에서 미리 자포자기하는 남자 
해 석 : 
1998년의 유행어. 최근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늘어나고 있는 현상으로, 연애를 할 때 상대 방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상대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지레짐작해 결국 이뤄질 수도 있는 관계를 미리 끝내버리는 남자. 
예) "얼마 전에 만났던 남자 어때?" "아~ 헤어졌어" "왜?" "아~ 그 사람 자폭남이었어.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내다가 끝내자고 그러더라. 나는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어..." 

129. コムロする 
의 미 : 밤새다 
해 석 : 
1996년의 유행어. 여고생들 사이에서 유행한 말. 음악 프로듀서인 코무로 테츠야에서 연상 되는 말로 '철야하다' '밤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131. チョ- : cy 
의 미 : 최고 또는 매우 뛰어나다는 뜻 
해 석 : 
1992년부터 사용된 말. 한자로 쓰면 <超>에 해당하는 말. 매우 뛰어나고, 최고라는 뜻으 로 사용되는 접두어이다. 신세대 용어를 이해할 때 반드시 알아두어야만 하는 말이다. 하 지만 일본어를 손상시키는 일이라고 기성세대로부터 늘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34. 牛しばく : 규시바쿠 
의 미 : 규동 먹으러 가자 
해 석 : 
일본의 간사이 지방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시작해 전국적으로 유행한 말. 원래는 '챠시바 쿠(茶しばく)'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표현은 '차 마시러 함께 가자'라는 의미. 거기서 파 생된 말이다. 
이 밖에도 '하게시바쿠ハゲしばく' = '하겐다즈 아이스크림 먹으로 가자', '네즈미시바쿠 (ねずみしばく)' = '도쿄 디즈니랜드(디즈니의 미키마우스가 쥐이므로)에 놀러 가자'라는 말이 있다 

135. オ離婚 : 오리콘 
의 미 : 특별한 결혼식 후 바로 이혼하는 현상 
해 석 : 
결혼업계에서 시작된 용어로, 결혼식장과 호텔이 준비한 결혼식 계획을 따르지 않고 레스 토랑에서의 피로연과 해외에서의 두 사람만의 결혼식 등 이른바 '오리지날결혼식'을 한 부부가 결혼 직후 이혼하는 경우가 많은 현상을 가리킨 것. 
이혼 이유는 '오리지날 결혼식'의 경우 레스토랑 예약과 초대장 발송 등 준비가 복잡한데 남자 측이 일을 핑계로 신부에게 맡겨 버리는 경우가 많아 그런 불만이 결혼식 후 터져나 오면서 바로 이혼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상위시대를 표현하는 말로도 자주 사용된다. 즉 자신이 생각한 대로되지 않는 다고 판단하는 여성은 곧바로 이혼을 선언하기 때문. 

136. マック ショブ : 맥잡 

의 미 : 패스트푸드점에서와 같은 단순 노동을 하는 일거리를 의미 
해 석 : 
맥도날드에서 일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패스트푸드점에서의 단순작업을 의미. 패스트 푸드점의 점원은 저임금, 저지위, 저보장의 대명사. 그런데 최근에는 경기침체로 고교생, 고교 중퇴자 속에 대졸자들도 끼어 있는 경우가 많다. 

139. リゾラバ現象 : 리죠라바 겐쇼우 
의 미 : 젊은 일본의 여성들이 괌이나 하와이등의 리조트지 에서 외국인 남성과 즉석에서 만남을 갖고 연애를 하는 것. 
해 석 :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자를 사는 것으로 남자를 단시간에 꼬시기는 어렵기 때문에 돈이나 고가의 선물로 유혹한다. 일본남성들의 동남아시아 매춘 여행을 비난하는 여론이 있었지 만 여성들 역시 같은 입장이 되어 사회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141. OL半減期 : OL한겐기 
의 미 : 직장 3년차 여성 커리어우먼이 줄어드는 현상. 
해 석 : 
대졸 여사원의 대다수가 입사 3년 사이에 결혼과 전직으로 회사를 그만두어 50%까지 줄 어드는 현상. 입사 3년차인 25세 전후의 대졸 여성들이 혼기를 놓칠까 우려해 과감히 직 장을 그만두고 결혼 전선에 뛰어들어 비롯된 현상. 일반적인 사회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대화 속에서 이 단어 자체가 사용되지는 않는다.

146. 公園戰士 : 코우엔 센시 
의 미 : 유치원에 아직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에 나가 놀아주는 아버지들을 일컫는 말. 
해 석 : 
코우엔마마(공원 엄마.公園ママ)의 아버지 판으로 회사가 쉬는 토요일에 공원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놀아주는 것이 본래의 취지이지만 아빠들은 엄마와 다르게 아이를 혼자 놀게 하고 벤치에 앉아 경마 실황 등의 라디오를 들으며 노는 아이들을 쳐다보기만 한다. 이 사이에 엄마들은 미용실에 가거나 자기 개인적인 일을 한다고 한다. 

147. 二世代アニメ : 2세대아니메 

의 미 : 부모 세대가 커서 자식 세대와 함께 보는 애니메이션 
해 석 : 
1965년대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이 리메이크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 그 연대에 애니 메이션을 보고자란 세대가 아이를 갖게 됨에 따라 자신이 재미있게 봤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을 자식들에게 설명하면서 부모 자신도 즐거워진다는 기획 아래 다시 제작된 애 니메이션들을 말한다. 

148. 外國はがし : 가이코쿠하가시 

의 미 : 외국물 벗기 
해 석 : 
1991년부터 귀국자녀들을 중심으로 자조적으로 사용되어 온 말. 외국에서 태어나거나 자 라면서 몸에 익은 생활방식이나 언어습관 등을 버리고 일본식으로 바꾸지 않으면 일본 사 회, 특히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없는 귀국자녀들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컨대, 외국에서 익힌 영어 발음은 그대로 발음하면 훨씬 좋은 것인데 이를 시기하는 사 람들이 많아 오히려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식 영어발음을 빨리 습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별 생각 없이 한 발음이 영어선생님을 당혹스럽게 해서 반 아이들의 웃음을 유발하는 등의 난처한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151. すぐやめ社員 : 스구야메샤인 
의 미 : 젊은 이직자들 
해 석 : 
구조조정을 당한 것도 아닌데 입사하자마자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젊은 이직자들. 경력 때문에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직장을 전전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입사와 동시에 전면에 나서 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서 류정리와 같은 일을 시키면 바로 그만두어 버린다 

152. ハラチャリ族 : 하라챠이족 

의 미 : 도시의 번화가를 자전거로 누비는 젊은이들 
해 석 : 
1998년부터 사용되고 있는 말. 도쿄 하라주쿠 주변을 자전거로 왕래하는 젊은이들. 패션 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사용하면 시부야, 롯본기, 에비스 등 젊은이들이 주로 모이는 거리 를 왕복 1시간만에 주파할 수 있다. 
자동차로 가려면 정체 때문에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데다 가더라도 주차할 곳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 자전거를 이용하면 그럴 염려가 없다. 자동차 정체가 심각한 지역이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자구책으로 시작한 것인데 그것이 젊은이들의 패션처럼 되어 버린 현 상이다. 

154. オレ樣 : 오레사마 
의 미 : 자기 의견만 옳다고 여기는 사람 
해 석 : 
주변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만의 '유아독존'적인 세계를 유지하는 사람. 현대사회 에서는 다른 사람의 기분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잘 융화되는 게 중요한데 이런 남자들은 방약무인하다고 느껴지는 행동을 하고 자기 주장이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생 각한다. 축구 일본대표선수 중 나카다 선수가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155. 困った人 : 고맛타히토 

의 미 : 같이 일하기 힘든 또는 싫은 사람 
해 석 : 
업무나 직장에서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정신적 스트레스가 쌓이고 온통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는데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인 사람. 일본의 출판사들은 <고맛타히토와 사귀는 방법>과 같은 책을 출 판하기도 한다. 
예컨대 다름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실수를 해도 사과하지 않으며, 필요 없는 충고나 발언을 상사 앞에서 해 주의를 자주 듣고, 잘못해서 혼이 날 때 울어버려 사람을 곤란하 게 한다. 또 울기만 하면 모든 게 용서된다고 생각하는 타입 등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156. オタク難民 : 오타쿠난민 

의 미 : 아버지를 피해 집을 떠나는 오타쿠들! 
해 석 : 
1993년에 유행했던 말. 각 가정의 아버지들이 잔업이나 야근이 없어지고, 회사의 단축근무 방침에 따라 일찍 귀가한다. 집에 돌아 온 가장들은 별다른 일이 없자 이리저리 잔소리를 늘어놓고 다니는데 언제나 게임만 하고 있는 '게임 오타쿠'나 애니메이션만 보고 있는 ' 비디오 오타쿠'가 되어버린 자식들이 주 공격대상. 
이들 자식들은 아버지의 설교를 견디다못해 집을 나와 게임 센터로 자리를 옮기는데 이들 을 오타쿠 난민이라고 한다. 덕분에 어머니들은 아들을 집밖으로 내모는 아버지를 비난 하게 된다. 

157. オタカラ : 오다카라 

의 미 : 가라오케 매니아 
해 석 : 
1999년부터 유행한 말. 가라오케 매니아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노래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노래하는 사람이 없는, 예컨대 극장이나 뮤지컬 무대를 빌려 노래를 하는 걸 말한 다. 이런 경우 비용이 들기 때문에 평소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한 장소를 빌려 광란(?) 의 밤을 보내는 것이다. 

158. ガ-ルポップ : 갸르폿프 

의 미 : 걸팝(Girl Pop) 
해 석 : 
1993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말. 음악성과 상관없이 여성 보컬리스트를 중심으로 가수를 분류하는 것으로, 유명한 음악잡지도 있다. 하지만 걸 팝에 분류되는 여성 가수 중에는 직 접 작사, 작곡을 하거나, 곡을 제작하는 과정에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여성 가수들이 많다. 
자기 독립성이 강한 여성 가수들로서 나가이 마리코(永井眞理子), 모리타카 치사토(森高千 里), 타미무라 유미(谷村有美) 등이 대표적인 가수들이다. 

162. 日記のカラオケ化 
의 미 : 일기를 인터넷에 올리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 
해 석 : 
1999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 가라오케 화라는 것은 가라오케에서 노래하고 있는 사 람은 아무도 듣지 않아도 즐겁게 노래하며 자기 만족을 얻는다는 의미. 
따라서 '일기의 가라오케화'는 최근 인터넷 개인 홈페이지에 자신의 일기를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으려고 하지 않는데도 매일 자신의 일기를 홈페 이지에 올리며 자기만족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165. アニバ-サリ-ビデオ 
의 미 : 비디오 카메라를 이용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셀프카메라 식으로 찍어 기록으로 남기는 것. 
해 석 :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자신에 대해 뒤돌아보게 된다. 예전에는 글로 많이 남겼지만 요즘 에는 비디오 카메라를 이용해 자신의 모습과 함께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전문적으로 촬영장소를 빌려주거나 인터뷰를 해주며 돈을 받는 회사도 생겼다. 

166. アイコラ : 아이코라 

의 미 : 아이돌 꼴라쥬(アイドル コラ-ジュ)의 줄임 말로 아이돌 스타의 얼굴과 여성의 알 몸사진을 컴퓨터로 합성하여 아이돌 알몸사진을 만들어 인터넷 홈페이지 상에 게 재하는 것을 말한다. 
해 석 : 
인터넷이 많이 대중화됨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유명 아이돌의 사진과 알몸 사진을 합성하는 일이 많아졌다. 피해를 당한 스타들에게는 상당히 곤욕스러운 일로 점 점 합성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의 눈을 감쪽같이 속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168. 地味ペ-ジ : 지미페이지 
의 미 : 인터넷 홈페이지중 문자중심의 간단한 사이트를 말한다. 문자수도 지극히 적고 동영 상도 없다. 오로지 문자로만 되어 있는 페이지. 
해 석 :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연계된 새로운 방식의 사이트로 휴대전화로 인터넷을 검색하는 사람 들을 위해 만든 간단한 사이트이다. 일본은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한 전용선 요금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휴대전화로 인터넷을 검색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휴대전화에 제공하는 컨 텐츠를 정리한 홈페이지로 매우 간단한 문장으로 되어있다. 

169. チャイドル : 챠이도루 

의 미 : 15세 이하의 어린이 아이돌 스타. 
해 석 : 
15세이하의 아이돌로 겉보기에는 어른과 다름없는 스타를 지칭한다. 예를 들면 얼마전 해 체한 그룹 SPEED처럼... 멤버 중 '시마부쿠로 히로코(島袋寬子)'는 1984년생으로 초등학 교 6학년때 데뷔했다. 

170. 怪獸ヘジマ : 카이쥬헤지마 

의 미 : 헤드폰족 
해 석 : 
지하철 안에서 헤드폰을 낀 채 만화를 읽고 있는 젊은이들. 지하철의 문이 열리자마자 노 인들을 제치고 뛰어들어와 옆사람과 떨어져 앉아 다리를 떨며 헤드폰을 낀 채 만화를 읽 는 젊은이들을 말한다. 
옆사람과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데도 워낙 음악소리가 커서 주 변 사람은 치카치카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런 행동에 대한 비판이 여기저기서 제기 되자 최근 젊은이들은 아예 지하철 바닥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곤 한다. 

171. ガイッシ-君 

의 미 : 외국기업에서 일하려는 젊은이 
해 석 :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 국제경쟁력이 있는 외자계 기업에서 일하겠다고 생 각하는 비즈니스맨. 실력주의자이기 때문에 젊은 나이라도 고액의 연봉을 받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관계와 같은 부분에서 서툴러 꿈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해외에서 자란 귀국자녀와 같은 사람들은 외자계 회사에 들어가서도 곧잘 성공하지만 일본에서 자란 젊은이들은 문화적 차이 때문에 당황하는 경 우가 많다. 

172. 歸れない症候群 : 카에레나이쇼코군 

의 미 : 집에 가고 싶으나 갈 수 없는 샐러리맨 
해 석 : 
퇴근 시간이 되어도 집에 가지 않고 할 일 없이 자리를 지키는 샐러리맨. 집에는 가고 싶 지만 인사고과에 '얼마나 노력하나'와 같은 애매한 항목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모 습을 보여주기 위해 매일 야근을 선택하는 회사원들을 말한다. 
흔히 일본 직장에서는 사시미의 법칙(三四三の法則)이 있는데 전체 직장인의 30%는 특별 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로 출세가도를 달리고, 40%는 출세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 3 30%는 출세에 관심이 없거나, 출세 길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 중 귀가하지 못하는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은 중간 단계인 40%의 샐러리맨. 아직 출세를 하게 될지 아닐지 결정되지 않은 이 부류의 사람들은 상사에게 인정받기 위해 최 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175. 學X君 : 각군 
의 미 : 쓸모 없는 일류대생 
해 석 : 
1999년부터 사용되는 말.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왔지만 능력이 없는 사람을 말 한다. 학교 공부를 잘해 기억력과 계산력은 어느 정도 있는데 기획력과 창의력이 형편 없 는 데다 자존심만 강해 사람들과 사사건건 부딪히는 타입. 

176. かくれリッチ : 카쿠레리치 

의 미 : 집 걱정 없는 2세들 
해 석 : 
아버지가 도쿄 주변에 땅과 집을 가지고 있고, 미래에 이를 상속해 줄 작정이기 때문에 내 집 마련을 위해 따로 저금할 필요가 없는 2세들을 말한다. 부모로부터 집이나 땅을 상 속받는 부부는 그렇지 않은 부부들에 비해 생활 면에서 윤택하기 때문에 이럴 가능성이 있는 남자나 여자들이 일등 신랑신부감으로 우대 받고 있다. 

178. 花長風月 : 카쵸후케츠 
의 미 : 신세대들의 입사조건 
해 석 : 
대학생들이 취업 시 회사를 고르는 조건. 첫째 화(花) - 화형(花形)산업일 것. 한마디로 잘 나가는 회사일 것이라는 뜻. 둘째 장(長) - 한 달 이상의 장기 휴가제도가 있을 것. 세 째 풍(風) - 회사의 분위기가 좋을 것. 넷째 월(月) - 월급수준이 높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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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daum.net/qna/openknowledge/list.html?category_id=HA와http://kin.naver.com/opendic/index.nhn의 의미 참조하였고, 자료출처는 너무 혼란스럽게 공개되어 있어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데모도리무스메
1. 出戾り娘
2. 일본유행어로 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으나 임대료, 공과금, 요리 등의 문제로 다시 부모님 곁으로 돌아오는 딸을 일컫는 말로 사용.


츠노가쿠시걸
1. 角隱しギャル
2. 일본유행어로 내숭녀를 뜻함.
3. 최근 결혼을 원하는 20대 초반의 여성들 사이에서 늘어나고 있는 현상임.


츄무스메
1. チュ-娘
2. 일본유행어로 타인의 시선보다 지신의 만족을 우선시하는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


치-마-
1. チ-マ- 
2. 일본유행어로 번화가에 몰리는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말.
이들은 서로의 핸드폰 번호를 공유하며 연락을 하고 몰려다님.


다라코미
1. だらコミ
2. 일본유행어로 특별한 용건도 없이 휴대전화로 사소한 말을 떠들어대는 것을 가리키는 말임.
3. 한없이 질질 끄는 대화를 뜻하는 다라다라 커뮤니케이션의 줄임말.


다메고
1. ため語
2. 일본유행어로 대화 상대가 나이가 많아도 친구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뜻함.


타나아게보우야
1. たなあげぽうや 
2. 일본유행어로 1989년 봄 유행했던 노래 타나아게보우야(たなあげぽうや)에서 생겨난 말.
자신의 약점은 눈감은 채 남의 결점만을 지적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사용.


타이이쿠카이케이
1. 體育會係
2. 일본유행어로 솔직하고 의리있는 여성을 이르는 말.
3. 타이이쿠카이케이인 여성인 경우 '동료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타이이쿠카이켄이인 남성인 경우 '예의 바르고 규칙을 잘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


스가미
1. 素髮
2. 일본유행어로 자연스러운 헤어스타일을 의미하는 말.
3. 정성을 다해 가꿨으면서도 꾸민 것처럼 보이지 않는 헤어스타일.


신테이네이고
1. 新ていねい語
2. 일본유행어로 '난 너랑 친해지고 싶지 않다'란 의미를 담고 있는 말.
3. 자신이 친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쓰는 정중한 표현.


쥬라식 페이스
1. ジュラシック フェ-ス 
2. 일본유행어로 공룡같이 생긴 얼굴을 뜻하는 말.
공룡처럼 야성적이고 강인해 보이는 얼굴을 가리킬 때 사용됨.


슈노라
1. シュノラ 
2. 일본유행어로 정리정돈에 모든 걸 바치는 주부를 뜻함.


슈쇼쿠아카홍
1. 就職赤本
2. 일본유행어로 취업 정보를 모은 책을 일컫는 말.
3. 슈쇼쿠아카홍에는 인기 기업의 채용 특색과 정략포인트, 채용 실태와 특징 등이 항목별로 정리되어 있음.

就職Jリ-グ(슈쇼쿠J리그)
취업 준비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기업체들을 부르는 말


싯파이토오리
1. 失敗撮り
2. 일본유행어로 카메라 파인더를 보지 않고 셔터를 누르거나 손이 흔들리는 걸 상관하지 않고 찍는 사진을 말함. 
3. 자신의 맘대로 재밌게 찍는 사진을 일컫는 말로 사용됨.


7·5·3리쇼쿠
1. 七·五·三離職 
2. 일본유행어로 이직 경향을 뜻하는 말.
3. 취직한 후 3년 이내에 중졸의 70%, 고졸의 50%, 대졸의 30%가 회사를 그만두는 경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됨.


지짓콘
1. 事實婚
2. 일본유행어로 친척들을 모아 놓고 식을 올렸지만 여성이 성을 바꾸는 걸 싫어해서 법적으로 혼인신고서는 제출하지 않는 결혼을 뜻함.


시콘
1. 試婚 
2. 일본유행어로 동거를 뜻하는 말.


지코츄쇼힝
1. ジコチュ-商品
2. 일본유행어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만 만족하면 되는 상품을 일컫는 말.
요즘 젊은 여대생들은 타인의 시선에 상관없이 자신이 좋으면 좋은대로 짧은 미니스커트를 착용한다.
이런 미니스커트를 지코츄쇼힝(ジコチュ-商品)이라 할 수 있다.


더블스쿨조쿠
1. ダブルスク-ル族 
2. 일본유행어로 입사시험에 유리하려고 대학 재학 중에 각종 전문학교에 열심히 다니며 실용 자격증을 따는 학생.
3. 불황으로 자격증을 많이 가진 학생들을 우대하면서 본업과 부업이 뒤바뀐 학생들이 속출하며 생긴 용어


쉐어세이카츠
1. シェア生活
2. 지가가 높아 방을 크게 할 수 없어서 방은 따로 쓰면서도 생활용품 등을 공유하는 공동체형 생활방식으로 추정


시마겐쇼
1. シ-マ現象
2. 고급 물픔을 지향하는 현상


미나이사라리만
1. 三ないサラリ-マン
2. 무능한 샐러리맨


선데이프로그래머
1. サンデ-プログラマ-
2.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컴퓨터 소프트웨어 만들기가 취미인 사람들. 이들은 주중에는 회사에 다니고 주말에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자료실에 올리는 재미로 산다. 자신이 개발한 프로그램은 대부분 무료로 다운 받도록 하는데 그 중에는 유료화에 성공해 연간 1억원 이상의 부수입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미스기가조쿠
1. 三過ぎ家族
2. 세 가지가 지나친 가족 어른들은 일이 너무 많고, 아이들은 방과 후에도 학원에 다니는 등 공부가 너무 지나치고, 노인들은 할 일이 없어 한가함이 지나친... 가족이기는 하지만 각자의 생활에 너무 바빠 분열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3C결혼
1. 3C結婚
2. 신부의 조건으로 학력, 신장, 수입의 3고(高)를 요구하는 여성들에 대해, 남성들이 요구하는 최고 신부감의 조건. 이것은 왕세자비를 모델로 했다고 하는데 조건은 커리어(공무원은 전문직, 회사는 간부급), 클래스(상류계급의 자녀), 클리버(재색겸비)의 3C.


サビラン族(사비란족) 

의 미 : 혼자 점심 먹는 직장인 
해 석 : 직장 여성들끼리 소근대는 용어. 혼자서 외롭게 점심을 먹는 상사를 말한다. 직장 여성들은 점심시간에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시끄럽게 떠들며 밥을 먹는 게 낙인데 그런 그녀들의 눈에 혼자 밥을 먹는 나이 든 상사들은 외롭고 불쌍해 보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회의와 발표의 연속인 남자 샐러리맨에게는 점심시간만이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불쌍한 샐러리맨들.


サンキュッパ亭主(산큣파테이슈)

의 미 : 39,800엔짜리 아빠 
해 석 :정가 39,800엔짜리 양복을 입고 다니는 처자식이 딸린 샐러리맨. 경기 후퇴로 절약이 최고의 목표가 되자 양복 구입 예산이 깍이게 되었다. 처자식이 딸린 샐러리맨들의 하루 용돈은 평균 2000엔. 때문에 '2000엔 남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스스로 돈을 벌면서도 결국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지도 못하고 맘대로 용돈을 쓰지도 못하는 불쌍한 남편들을 자조적으로 부르는 말.


コンビニ症候群(콘비니쇼-코군) 

의 미 : 편의점 증후군 
해 석 :하루 한번 이상 편의점에 들르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증상.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인들의 삶에서는 편의점을 떼어놓을 수 없다. 특히 일본의 젊은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집 근처에 1, 2군데의 편의점이 있었기 때문에 편의점을 떼어놓고는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때문에 특별히 살 게 없어도 편의점에 들르는 이런 신종 증후군이 생기기도 한다. 


サラベタ タイプ(사라베타 타입)

이율배반적인 여성들의 이상형

젊은 여성들이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그리는 것. 청결하고 전체적으로는 깔끔하지만 자기 여자에게만큼은 땀을 흘릴 줄 아는 남성을 말한다. 여기서 땀이란 아침에 샤워를 하는 사람의 땀이다. 흔히 여성들은 오다 카즈마사(小田和正)나 차게 앤 아스카의 노래에서 느낄 수 있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コンビニ離婚(콘비니리콘)
간단한 이혼
직장에 다니던 독신 여성이 결혼을 하고도 맞벌이로 바쁜 나머지 편의점에서 파는 음식들을 전자렌지로 돌려 그대로 내놓다가 남편에게 이혼당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생긴 용어. 간단하게 이혼해 버리는 젊은 부부의 풍속도를 이르는 말로, '나리타리콘(成田離婚)'과 비슷한 말이다.


紺ハイソ(곤하이소)

일본 여고생들의 교복 패션 대명사가 된 '루즈 삭스(흘러내린 양말)'에 이어 나타난 새로운 유행으로 '감색의 하이삭스'의 줄인 말. 짙은 감색의 반 스타킹을 무릎 밑까지 단정하게 올린 패션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 일본의 여고생들은 취향에 따라 루즈 삭스 아니면 하이 삭스를 선택하고 있다. 그런데 반드시 주의할 것 하나! 루즈 삭스건 하이 삭스건 양말은 '폴로'나 '랄프로렌'처럼 고가 상표일 것!


五種の神器(고슈노진기) 
일본 황실이 갖고 있다는 '3종의 신기'를 패러디한 말로, 크리스마스 때 남자들이 여자를 위해 꼭 준비해야 하는 5가지를 말한다. 그 5가지란 시티 호텔, 고급 레스토랑, 귀금속 악세사리, 꽃다발, 자동차.


ごほうび消費(고호우비쇼히)
젊은 여성들이 고급 물건을 살 때 스스로를 위로하며 쓰는 말. 즉 '나는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이 정도는 나에 대한 포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결코 낭비가 아니야"라는 것. 물건 뿐만 아니라 에스테틱, 여행, 문화 생활 전반의 소비 생활에서 자주 사용된다.


しわよせの亭主(시와요세테이슈) 머슴 남편

ギャル男君(갸르난군) 여자같은 남자

出たきり老人(데타키리로진) 가족의 눈치를 보는 노인

主婦男 (슈후오) 가사를 즐겨 하는 남성

プチおけいこ (푸치오케이코) 출근전의 30분 , 점심시간의 15분이라는 단시간의 학원.

아메라지안(アメラジアン) 아시아계 미국인

코꾸닝[고치화]현상 (コク-ニン[繭化]現象)가정에 틀어박혀 집 안에서만 노는 현상

포타리안(ポッタリアン)소설 「해리 포터」의 열정적인 팬


칼라 갱단(カラ ギャング團) 소년 갱단

스페츠루(スベツル) 남자도 예뻐야 산다!

デント-系(덴토케이)  전통예술을 하는 인기남(?)

DODA(도다)  직업을 바꾸다?!

ニャ語/ニャ族(냐고/냐조쿠) 고양이 울음소리처럼 이야기하는 여성들

ナオラ-(나오라) 연하 남자친구를 가진 여자?!

トレカ(토레카) 트레이드 카드

負け犬組(마케이누구미)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

トランタン(토란탄) 서른 살 또는 30대

ドメス(도메스) 국내파 샐러리맨?

どじよう本(도죠우홍)
출판업계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그와 비슷한 내용이나 주제의 책들이 속속 등장하는데 그런 책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 <아침형 인간>류의 책이 인기를 끌었는데 일본에서도 마찬가지. 미꾸라지들이 늘 몰려다닌다고 해서 '도죠우'라는 말을 붙였다고 한다. 보통 독자들이 비슷한 책들을 여러 권 연달아 읽는 성향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

자료참조 및 출처 : http://cafe.naver.com/kokojaja와 tojapan.co.kr(추정)